2. 의천의 대장경 : 속장경이 아니다.
고려 문종(文宗) 17년 (AD. 1055) 거란은 그들의 대장경을 고려왕실로 보내왔고, 그 대장경의 수준에 자극을 받아 고려는 그 장점을 수용하여 더욱 수준 높은 온전한 대장경을 완성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문화는 중원을 주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다원적으로 형성되어 간 것이다.
고려는 불교문화의 세계중심지로서 3차에 걸친 대장경조조사업을 벌인다. 제2차의 대장경조조가 바로 이른바 “의천(義天)의 교장(교장(敎藏)” 인데 이것을 일본 학자들이 1920년대 비하시켜 “의천속장경(義天續藏經)” 이라고 이름한 것을 그대로 계승하여 의천속장경으로 부르고 있다. 의천(義天, 1055-1101)은 문종 4째아들로서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배경으로 당대의 방대한 세계불교문헌을 수집했다.
의천은 천태종의 근본사상인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서 선과 교의 화합을 도모하고,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그는 불경의 이해가 어느 종파에 국한될 수 없으며, 모든 교학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대장경 사업을 교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후대에 각 종파에서 발전한, 삼장(三藏)에 대한 주소(註疏)류의 문헌과 잡다한 연구 논문들, 그리고 한국의 주소전통의 문헌들을 총망라하여 그의 대장경 편찬사업을 완성하였기 때문인데, 대장경에 대한 속편인듯한 인상을 주는 “속장경” 이라는 표현도 잘못된 것이지만 의천대장경을 그의 “신편제종교장목록(新編諸宗敎藏目錄)”에 의거하여 단지 “교장” 이라고 부르는 것도 단견이다.
교장은 어디까지나 대장경의 확대개념일 뿐이며, 주소를 편찬할 때도 원문이 다 같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단지 “교장”이라 부를 수는 없다. 교학불교적인 별책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의천대장경은 대장경의 편찬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매우 에프칼한 조조사업이었던 것이다(대강 1092-1100 사이에 완성). 그러나 이 위대한 두 차례의 문화사업의 세계사적 성과물인 대장경 경판들이 모두 몽골의 침입으로 회록지재(回祿之災)를 당하고 만다. 고종 19년, AD 1234년의 일이다.
그리고 바로 2년 후 제3차 대장경사업이 이루어 진다. 1236년에 시작하여 1251년까지, 그러니까 16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 기적 같은 대장경사업을 단지 몽골의 병화를 불심(佛心)으로 극복하겠다는 종교적 신념의 한 금자탑으로 보는 터무니 없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생각해 보라! 6‧25전쟁 때 북쪽에서 엄청난 텡크군단이 밀려 오는데 그것을 대장경판각으로 물리친다! 도대체 이게 상식적으로 될 성부른 말인가? 제3차의 대장경조조는 제1차와 제2차의 대장경조조와의 연속선상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몽골병의 화환(禍患)은 세계적인 대문화사업의 계기를 마련한 것일 뿐, 표면적인 레토릭이 어떠한 상징적 수법을 쓰고 있든지간에 그것은 고려라는 대제국의 역량이 문화적 사업과 전쟁사업을 분리시켜 진행시킬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한 포텐셜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택도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16년간의 제3차 고려대장경조조는 그 자체로써 전쟁대비사업보다도 더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소모해야만 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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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hcinews.asia/ArticleView.asp?intNum=7167&ASection=001001